[수양회절기][부활절] 고린도전서 15장 1~34절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
오늘 말씀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특히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육체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여러 모양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나의 부활신앙을 돌아보고 속이 꽉 찬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1장 구원의 조건과 복음의 내용(1-11)
1절, 2절, 3절의 너희에게 전한 복음, 내가 전한 그 말, 내가 받은 것은 3, 4절에 나온 대로 모두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복음을 영접하고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력서 종교난에 “기독교”로 쓰고 식사 전 감사기도도 하고 주일날 함께 모여 예배도 드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2절 말씀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구원의 항구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장차 우리를 구원으로 들어가게 할, 굳게 지키고 제대로 믿어야 할 복음은 무엇입니까? 3절 하반절과 4절입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우리 죄가 그리스도를 죽게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저 착하게만 살면 나쁜 일 안 하면 구원을 받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합니다. 하지만 죄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켜 심판과 형벌을 받게 만듭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 놓는 모든 엇나간 마음과 생각과 계획과 욕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나를 살리시려고 나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죄로 죽은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됩니다.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왜 굳게 믿어야 할 복음일까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잠간 기절하셨다가 깨어났다고 말하는데 온 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창자국과 못자국의 상처가 벌어져 고통스럽게 깨어나신 분에게 무슨 희망을 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만에 시간과 공간, 물질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현실과 자기에게 매이지 않고 부활의 생명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절에서 10절은 지금도 살아 있는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의 목록입니다.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 예수님의 체포와 십자가형 언도에 뿔뿔이 흩어졌던 열두 제자들, 바리새인과 로마 당국의 권세 앞에 숨죽이고 숨어 있던 오백여 형제들,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예수님을 배척했던 야고보, 학벌도 재산도 지위도 보잘 것 없었던 수많은 사도들, 마지막으로 살기등등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사도 바울까지 모두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180도 다른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삼천 명을 회개시키고 예수님을 위해 능욕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땅끝까지 예수님을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이 대단했던 엘리트에다가 교회를 이단 취급하며 무섭게 핍박했던, 오늘날로 치면 하바드대 출신의 IS 특공요원쯤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무너져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고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겸손한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의 주님은 실제로 IS 대원의 꿈에 나타나 그들의 구주가 되시는 것을 꺼려하지 않으십니다. 이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과거와 현재의 자신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더욱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조끔 엘리트에다가 IS 대원보다는 훨씬 착한 대학생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증거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보다 온 우주보다 크신, 죄와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신 부활의 주님께서 이들에게 친히 나타나시고 뜻두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이천 년 동안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단 한 번도 그 내용이 바뀌지 않았고 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계속해서 구원해 왔습니다.
제2장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2-19)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온 천하에 전파되었는데도 여전히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육체를 경시하고 영혼의 불멸만을 믿었고 유대인 중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아예 믿지 않았으며, 바리새인들도 마지막 날 의인의 부활만을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육체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도들조차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실제 삶에서 부활신앙은 막연하게만 다가왔습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지 이천 년이 지나면서 육체의 부활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믿고 있지만 여전히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억울하게 죽으면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돈다”, “착하게 살았으면 사람으로, 악하게 살았으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다” 등 그릇된 생각들이 많습니다. 믿는 사람들조차 육체의 부활이 갖는 실제적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육체든 영혼이든 죽은 후에 하늘 나라에만 가면 되지 않는가 싶기도 합니다.
13절에서 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가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육체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가령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시고 영혼만 살아나셨다든지 잠간 기절했다가 깨어나신 것이라면 사도들이 전파한, 죄를 지은 우리 육체가 구원받는다는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육체로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는 모든 전도자들도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육체로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면 비록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긴 해도 결국 모하메드나 부처나 공자나 안상홍 등 이미 죽어서 그 육체가 썩어버린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16절에서 18절입니다. 구약 시대 엘리야나 엘리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은 그 육체가 다시 소생한 것이었습니다. 신약 시대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아들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베드로와 바울이 죽은 사람을 살린 것도 죽은 사람의 몸이 다시 생명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신 사건은 그리스도의 육체도 다시 살리실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다시 살아난 그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육체와는 상관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우리의 실제 삶을 바꾸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의 육체로 지은 그 수많은 죄들은 단 하나도 해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다시 살아나 영광스런 몸을 덧입을 것을 믿고 죽은 수많은 성도들의 육체도 여전히 죽음에 삼켜진 채로 있을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부활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만 바라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죄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헛된 기대 가운데 결국 절망으로 끝날 믿음을 갖고 성경을 공부하고 자기 뿐 아니라 양들을 위해,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세계 선교와 성서 한국을 위해 드린 기도도 전부 헛짓거리입니다. 날씨도 좋은데 부활절 말씀을 들을려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참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질이 나는데 주님 때문에 참긴 왜 참습니까? 말 안 듣는 양은 연락을 끊으면 되지 왜 마음아파 하십니까? 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육체의 욕심을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소감을 쓰고 모임에 나오고 주님을 의식하는 삶을 사십니까? 날도 덥고 졸린데 각자 집으로 돌아가셔서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시든지 눈치보느라 못 드셨던 치맥을 시켜 드시든지 여러분의 육체가 원하는 일을 하십시오. 어떻게 하든 여러분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고 때가 되면 죽음이 여러분들을 삼켜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심판이든 지옥이든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그저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제 3장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으리라(20-28)
20절을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신구약 시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은 일시적인 생명의 연장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후반부에 나오는 대로 썩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을 모든 인류 중에서 가장 먼저 가지셨습니다.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시작으로 모든 신자들이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만큼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값진 것이 이 세상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적이 좀 안 나와도 직장이 좀 안 좋아도 사람들이 나를 좀 안 좋아해도 머리가 남들만큼 빨리 안 돌아가도 유머 감각이 좀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오늘 하루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장차 올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웃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1절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로 죽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손을 들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아담 안에서 동일한 육체를 지닌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쉽게 깨뜨립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우상숭배, 살인, 간음, 거짓, 탐욕 등 죄악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그 끝은 육체의 죽음 곧 첫째 사망이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둘째 사망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2절 후반부를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런데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신 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지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후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주님의 보배로운 피를 받아들일 때 나를 얽어매던 죄의 사슬이 풀려져 나갑니다. 이제는 죽음의 권세마저 깨드리신 부활의 능력이 죄로 죽었던 내 영혼과 육체에 새롭게 부어져서 매일매일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이 다가올 때 영원한 부활의 몸을 덧입을 소망 가운데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도 예외없이 이 부활의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걸고 당신의 부활을 담보로 약속하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영원한 노예해방 선언문입니다. 죄악의 파도가 우리가 타고 있는 구원의 보트를 침몰시킬 듯이 덮쳐올 때, 죽음의 해일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쓸어버릴 듯이 달려들 때도 모든 사람에게 삶을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소망의 닻을 내린 자들을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오직 이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죄사함의 권세와 부활의 능력이 충만하여서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도, 어떠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도 능히 생명의 세계로 옮겨놓을 수 있습니다.
23절입니다. 그런데 이 삶을 얻는 순서는 첫번째가 첫 열매인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은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 전에 믿음으로 살다가 잠들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이나, 이스라엘 뿐 아니라 각 나라 가운데 욥처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제대로 믿다가 죽은 성도들까지 그 몸이 영광스럽게 변하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산 채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이 땅이 아닌 공중에서 그리스도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24절에서 2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에 만연한 악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주민들이 굶어죽어도 마약과 핵무기로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려는 자, 거짓으로 사람들의 눈을 가리우고 참된 신앙을 핍박하고 말살하려는 자,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비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자기의 배만 채우려는 자, 거짓 과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고 퇴폐적이고 난잡한 예술활동으로 인간의 추한 죄악을 정당화하던 모든 자들이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의 발 아래 두려워 떨며 자비를 구하여도 결코 얻지 못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죄를 쏘며 모든 것 위에 군림했던 사망권세도 마지막으로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입니다. 마침내 억울한 것도 미운 것도 열등한 것도 없는, 해로운 것도 죄짓게 하는 것도 눈물 흘리게 만드는 것도 없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시키신 후에는 아들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만유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하나님께서 만유 안에 계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영롱한 새벽이슬에 하나님의 순수함이 깃들고 뛰어다니는 강아지에게도 하나님의 역동성이 드러나고 소리높여 찬양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희락이 넘쳐 흐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제 4장 깨어 의를 행하라(29-34)
29절, 30절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때를 염두에 두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또 사도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은 부활 신앙으로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는 자는 다시 살아날 것을 믿으므로 위험을 피하여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그 길이 아무리 위험하고 힘들어도 담대하게 나아갔습니다. 부활신앙이 있으면 어려운 상황을 즐길 수도 있고 남들이 회피하는 문제를 기꺼이 떠 안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부활의 주님이 그 상황보다 크시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형제들에 대해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엄청난 학벌도, 지식도, 업적도 아닌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이었습니다. 32절입니다. 에베소라는 오늘날의 뉴욕 같은 타락하고 흉악한 도시에서 그는 사람의 방법으로 맹수 같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구하면서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부활 신앙을 믿는 자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싸우지 않습니다. 그 뒤에 역사하는 사단과 영적인 싸움을 싸웁니다. 그리고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완전히 죽는 것 같은 상황에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한 번 체험한 부활의 능력이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게 만들고 결국 세상이 감당 못할, 죽음도 감당 못할 부활의 용사로 길러냅니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상황, 죽는 것 같은 상황에서 다시 살리시는 주님을 진실로 믿지 못하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위험 앞에 도전하기보다 안주하고 쾌락 앞에 참기보다 즐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보다는 소시민적인 삶을 우선시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실제 삶에서 무능력하고 영향력없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것은 죽음 앞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가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실 기회를 아예 차단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죽음의 강을 건너지 않고 부활의 새 날이 오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자신이 죽고 부활의 주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더 큰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부활의 주님을 의지한다면 실제적으로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34절입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믿음의 투쟁에 대해 상주시는 분인 것을 알지 못하고 꼬임에 넘어가는 신자들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말합니다. 혼미해지고 어두워진 마음에서 깨어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를 행하기에 힘쓰라고 명령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구원을 잃게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고 죄짓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를 죄짓게 하는 것들이 있으면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실제 삶 가운데 죄에 더욱 민감해지고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지한다면 우리의 구원의 보트는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도 구원의 항구와 점점 가까워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흘만에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굳게 믿고 실제 삶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고 옛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면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마지막 날 나의 이 죄악된 몸도 영광스럽게 변화시킬 것을 확실히 믿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 스피릿이 충만하다가도 악한 동무들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짓지 않도록 늘 깨어 의를 행하시는 한 분 한 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땅의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는 날 드릴 열매와 받을 상급이 있도록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살아내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한 분 한 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