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절기

[수양회절기][여름수양회] 요한복음 21장 1~17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으음으음 2025. 5. 30. 06:15

말씀: 요한복음 21:1-25
요절: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흔히들 성경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번 수양회에서도 저희는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정죄치 않으시는 용서의 사랑’,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신 언약의 사랑’, ‘십자가 대속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들, 특히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의 칭찬도 많이 받고 책망도 받았으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다혈질에다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역동적인 사랑도 가능하지만 상처도 크고 깊을 수 있는 유형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 아침식사를 하시고, 베드로에게 세 번의 사랑 고백을 받으신 후 그에게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여기에는 참으로 깊고 오묘한, 마치 다이아몬드가 빛의 각도에 따라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처럼 사랑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 우리에게 맡기신 양들을 먹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그 분을 온전히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 1장 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1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이미 두 번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저녁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고 죄사함의 권세를 위임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없어서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 8일 후에 다시 나타나셔서 손을 보고 옆구리를 만져 보라 하시며 믿는 자가 되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려워하고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디베랴 호수, 곧 갈릴리 바다에서 당신을 세 번째로 나타내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명의 제자 모두 일곱 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이들의 리더였고 예수님께 나의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한 도마의 순위가 2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3위를 차지한 나다나엘도 뭔가 믿음의 언행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리더인 베드로가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자 나머지 여섯 명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그물과 배를 빌려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여전히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바다였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처형당하실 때 예수님 곁을 지켜주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기억을 제자들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책감에 그들의 마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그저 말없이 노를 젓고 힘없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실패감이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은 제자들의 마음을 더욱 짓눌렀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날이 새어갈 때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이전처럼 육체로함께 하시진 못해도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제자들을 향해 있었고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면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책감과 실패감이 너무 커서 그들은 불의한 자신과 빈 그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5,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부드럽고 따뜻한 주님의 음성이 새벽녘 고요한 갈릴리 바다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음성에는 3년 동안 쏟아부은 사랑과 섬김을 배신과 도망으로 갚은 제자들에 대한 분노나 실망의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낙담하고 힘들어하는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진한 향기처럼 퍼져 나왔습니다. 제자들은 이 새벽에 누가 우리에게 유별난 관심을 가지는가 의아해 하면서도 “없나이다”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명령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실패의 밤이 아무리 길었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다시금 희망과 승리의 새벽이 찾아온다는 진리를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잡힌 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제자, 곧 이 책의 저자 요한이 드디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3년 전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과 거의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무래도 베드로에게 먼저 말해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 주님이시네” 베드로는 이 말을 듣자 마자 물고기 잡느라고 벗었던 겉옷을 잽싸게 다시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세 번이나 그 분을 부인했지만, 두 번이나 부활하신 그 분을 만나고도 다시 물고기 잡는 생활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은 이 주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분께 실수하고 헛소리하고 그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이 자꾸만 생각이 났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가르치고 고치고 씻겨 주신 그 분의 모습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다’ 말해 주었을 때 베드로는 물고기도, 다른 제자들도 버려두고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 갔습니다.

8, 9절을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은 배가 육지까지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작은 배를 타고 고기가 든 그물만 끌고 왔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스타일을 감당하려면 묵묵히 주위를 정돈하고 뒷처리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바닷물에 흠뻑 젖어 추위에 떨 제자들을 생각하고 따뜻하게 몸을 녹이라고 예수님이 준비하신 숯불이었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을 제자들을 먹이려고 예수님이 친히 준비하신 생선과 떡이었습니다. 부활하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보잘 것 없는 갈릴리 어부 일곱 명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한없이 낮아져 인생들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갈릴리 바다를 은빛으로 수놓은 아침 햇살처럼 제자들의 마음을 조금씩 밝혀가고 있었습니다.

10절에서 13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 잡은 생선도 좀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해 계신 예수님께서 차려놓으신 아침식탁이 제자들에게는 좀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가장 어색해하던 베드로가 재빨리 그물로 가서 가득히 차 있는 물고기가 153마리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돈이 없어 싸구려 그물을 빌렸는데 안 찢어진 것이 신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각자 잡은 물고기를 손에 들고 쭈뼛쭈뼛 서 있는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하시며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생선과 떡밖에 없는 조촐한 식단이었지만 제자들의 실수와 허물을 말없이 덮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넘쳐 흘렀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진 제자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굵은 사나이의 눈물만 뚝뚝 흘렸습니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시는가?’ 예수님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음식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제자들을 말없이 지켜보시다가 친히 숯불 쪽으로 가셔서 잘 익은 떡과 생선을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반찬보다 밥을 많이 먹는 베드로에겐 떡 두 개와 고기 한 마리를, 양이 적은 도마에겐 떡 반 개와 고기 반 마리를, 각자의 식성에 맞추어 인격적으로 섬기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저자 요한은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다시 강조합니다. 갈릴리 해변의 생선 숯불구이가 밤새 고기잡느라 허기진 제자들의 배를 채워 주웠다면 숯불보다 뜨거운 예수님의 사랑은 제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린 실패감, 절망감, 죄책감 등을 몰아내고 다시금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싶은 소원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밝아오는 태양처럼 제자들의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비추신 영원한 사랑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허물과 죄로 감히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실패를 만회시켜 주시고 사랑의 식탁을 차려 놓고 한 명 한 명 초대해 주십니다. 8년전 자신의 정욕으로 가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저를 UBF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통해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하시고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고 많은 양들을 보내주시고 쌍둥이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니는 회사의 매출도 올려 주시고 월급도 계속하여 올려 주시고 여러가지 부수입도 허락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는 서울역 노숙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실패하고 절망한 양들을 이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회복시키는 역사에 쓰임받기를 기도합니다. 저희 모임이 세상에서 상처받고 낙심한 영혼들에게 말씀의 식탁, 섬김의 식탁을 준비한다면 2천년 전 갈릴리 해변에 아침식사를 마련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저희 가운데 차고 넘칠 것을 믿습니다.


제2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15절을 보십시오. 아침식사가 끝나고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반석도 당신의 수제자도 3천명을 회개시키는 능력의 사도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요한의 아들에게 당신을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참사랑은 두 인격체가 모든 외적인 조건을 내려놓고 그 속마음을 숨김없이 고백할 때 생겨나는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가장 친밀한 결합입니다. 이 사랑에는 두 당사자 외에 다른 존재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두 존재에게 서로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며 처음엔 다를지라도 결국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랑을 인간들과 나누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완전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만, 이기심, 시기심, 정욕, 미움 등 죄로 오염되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자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악을 그 몸에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렇게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는 나 한 사람과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어린 아이처럼 먹이고 입히시는데 만족하지 않으시고 장성한 친구처럼 당신의 계획을 알려 주시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하십니다.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죄많고 부족한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영원토록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게만 나의 온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평범한 어부로서 육체로 오신 예수님과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님과 가장 많이 대화하였으며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도 미리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뜨거운 열정과 진심으로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그 열렬한 사랑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비열하고 어두운 배신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신과 저주를 끄집어내지 않으시고 다시금 베드로와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성을 맺고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처럼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내가 죽을지언정’ 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큰소리치다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질 수 없는 연약한 자인지 깊이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자기 마음 속에 예수님보다 더 사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도 발견하였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이스라엘의 회복도, 수제자의 위치도, 심지어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까지도 그 분 자체와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세 번이나 부인했던 이름이지만, 누추한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 분께 누가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아침에 눈을 떠서 가장 먼저 생각나고, 무슨 일이나 선택을 할 때 가장 먼저 찾게 되며,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가장 먼저 알리고 싶은 분,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느라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페트라 사모님도,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리틀 베드로도, 형제 안드레도, 단짝 요한도 이 예수님만큼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평생을 바쳐 장만한 배와 명품 그물 같은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할 때 이미 버렸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이런 마음을 아실 거라 생각하고 이 주님을 의지하여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하늘로 올라가실 예수님에게는 베드로처럼 연약하고 목자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 양들이 있었습니다. 이 어린 양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피값으로 사신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입니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들입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귀한 것을 맡기는 것처럼 예수님은 예수님께 사랑고백하는 베드로를 믿고 당신의 양들을 맡기셨습니다. 자신처럼 넘어지고 주저앉아 예수님을 부인할 수도 있는 연약한 어린 양, 세상에서 판단받고 정죄당하고 버림받을 수 있는 그런 양들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어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연약한 자신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잘 알기 때문에 베드로도 동일한 사랑으로 양들을 먹일 것이었습니다. 연약한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만이 예수님의 어린 양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인내하며 생명의 양식을 먹일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린 양을 먹이며 자기에게 임한 예수님의 사랑을 늘 새롭게 깨닫고 이전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이기 위해 예수님께 더 많이 묻고 예수님을 더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와의 사랑의 관계성도 더욱 깊어지고 어린 양들에 대해서도 안심할 수 있으며 이렇게 땅 끝까지 예수님의 사랑을 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어린 양을 맡기며 계획하신 놀라운 비밀입니다.

16절, 17절입니다. 예수님은 두번째, 세번째 거듭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사랑고백도 일시적인 감정이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의지의 결정체가 되게 하였습니다. 세 번의 사랑고백을 통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자책감,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 등을 벗어버리고 양들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 주고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베드로가 다시 넘어질 수도 있고 유대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에 이방인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이 이런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새롭게 깨닫고 다시 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다시 일어나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고백에 대한 요구는 결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고 뜨겁게 하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게 합니다.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전진하게 합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어떤 강하고 능력있는 사람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목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자기의지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양들을 감당하다가는 홧병이 생기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지, 그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배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 앞에 “네, 제게는 예수님밖에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저의 전부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는 저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들을 예수님처럼 사랑하고 먹이길 기도합니다. 때로 양들이 넘어져도 양들이 우리를 떠나가도 내게 맡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저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