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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베드로전서, 특히 1장은 마치 로마서나 요한일서를 읽는 느낌입니다. 올해 공부했던 마태복음의 그 나서기 좋아하고 가끔 헛소리하던 베드로가 쓴 것이 맞나 싶습니다. 그가 마태복음에선 체포되어 끌려가신 예수님을 여종 앞에서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이 서신서에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고난받는 성도 앞에서 확신있게 증거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사도의 권위로 ‘거룩한 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구약시대 하나님도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 명령하셨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죄인인 우리들이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베드로 사도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이 거짓되고 음란한 말세의 때에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흩어진 나그네(1-12)
1절을 보십시오. 사도행전에는 성령으로 완전히 변화된 베드로가 삼천 명, 오천 명씩 회개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대제사장, 헤롯왕은 이런 베드로를 두려워하여 옥에 가두고 채찍질합니다. 기독교 전승은 그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탈출했고 오늘날의 터키 북부 소아시아 지방에 1절의 교회들을 개척했다고 전합니다.
 
미국 드라마 “AD 더 바이블 컨티뉴스"는 당시 초대 교회가 유대인들과 로마 사이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위험했는지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성도들이 한밤중에 붙잡혀가고 그들이 사는 집은 불태워졌습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네로라는 무시무시한 폭군이 등장하여 어마어마한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으로 이미 지역적인 핍박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중국과 북한의 공산당,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중동의 IS가 교회를 미워하여 성도들을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장차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믿는 자를 대대적으로 핍박할 날이 올 것을 예언합니다.
 
이러한 박해 속에 흩어진 나그네는 언제 어디로 쫓겨갈지 모르는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그들은 이 땅 어디도 자신의 본향이 아니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애굽의 영화를 주저없이 버렸던 모세와 바벨론의 진미를 단호하게 거절했던 다니엘처럼 당시 나그네된 성도들도 고난받는 하나님 백성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면 불신 가족의 핍박, 세상 친구의 외면, 또래 사회의 냉대를 받습니다. 이런 불이익을 감수하고 꼭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만 할까요?
 
2절을 보십시오. 원래 조상의 헛된 행실을 따랐던 이방인들이 지금 흩어진 나그네로 사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먼저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들을 미리 아셨고, 성령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보혈을 뿌려 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능력이 흩어진 나그네들을 강력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와 택하심으로 이렇게 말씀을 듣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다시 복음진리, 특히 부활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죄인처럼 죽으신 예수님을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로 흩어진 나그네가 부활과 영생을 가진 거듭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비록 이 땅의 삶이 괴롭고 힘들어도 부활하신 아들 예수님과 찬송받으실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거듭난 몸으로 영원히 있게 될 그 날을 사모합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산 소망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더욱 불타오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부활한 몸, 천국의 상급,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대면 예배 등 결국 저 하늘나라에서 받을 나그네의 유업은 썩지도, 더럽혀지지도, 쇠하지도 않아 영원토록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해 놓으셨습니다. 비록 당장은 보이지 않고 만지지 못해도 이 유업은 이 땅의 어떤 것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하늘 금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나그네가 하늘의 유업을 받기 전에 말세에 나타날 구원을 먼저 얻어야 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마지막 심판 때에 멸망에서 건짐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상대적인 자기 의와 선행은 참담하게 무너질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하고 절대적인 의를 믿는 믿음만이 심판을 견디고 구원을 받게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심판 날에도 보호해 주십니다. 심판날까지 하나님이 친히 그 믿음을 지켜주십니다. 때론 격려하시고 때론 책망하셔서 우리를 이 믿음의 경주에 끝까지 남아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재물, 건강, 성공보다 이 믿음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있어도 나그네는 여러 가지 시험, 곧 유대인과 로마의 박해, 흩어짐, 굶주림, 매맞음을 당하다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으로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믿던 많은 형제들이 배교하고 믿음의 길을 떠났습니다. 바로 위에 북한 지하교회 성도가 받는 박해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남한도 차별금지법, 학생인권조례 등 반기독교적 법안으로 앞날이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험을 통해 구원받을 믿음은 더욱 확실해집니다. 나그네들은 능히 근심을 이기고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은 확실한 믿음, 정금보다 귀한 변치 않는 믿음을 빚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오히려 시험없는 평안한 환경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믿음이 부패하고 교회가 세속화되었습니다. 면죄부를 판매한 중세 로마카톨릭이 그러했고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오늘날 ‘믿음으로 구원이 보장되었으니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식의 거짓 복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반면 시련을 통과한 정금같은 믿음은 주님이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합니다. 일제 치하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 각오, 공산 치하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원자탄과 같은 믿음을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시련이 있는 곳에 믿음의 진보와 그로 인한 기쁨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께 언제 믿음이 성장했는지 여쭤보면 십중팔구 부모님의 핍박, 어려운 전공 공부, 홍해같은 취업 문턱, 암과 같은 건강문제, 애타던 결혼역사, 눈물나던 양들문제 등의 고난을 통해 살아계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시험이 닥쳐오면 오히려 감사하고 확실한 믿음을 가질 기회로 여겨야겠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못말리는 베드로는 또다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 자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 사랑고백도 하고 양치라는 사명도 받았지만 이 나그네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사랑하는 것에 울컥합니다. 박해받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곧 다시 오셔서 그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주시고 그들이 지킨 믿음을 칭찬하실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이런 나그네들에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고 찬송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을 소유한 불가사의한 나그네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나그네들의 믿음은 결국 영혼의 구원으로 보상받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다리며 끝까지 자기 믿음을 지킨 자들은 그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뭐라든 어떤 핍박이 있든 주님을 끝까지 믿고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한 분 한 분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10절에서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 믿음의 종착역,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가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것인지 되새겨 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 구원을 오래 전부터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난과 죽음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신 것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분이 그리스도일지, 언제 그 분이 오실는지 찾고 또 찾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오실 그분에 대해서, 선지자 다니엘이 그분이 오실 때에 대해서 잘 예언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초림, 공생애, 십자가 대속, 장사지내심, 부활, 승천, 재림을 성령의 감동으로 각각 예언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가 어떤 말씀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을 깨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연구할수록 예수님께 대한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모두 이루어지고 오직 재림만 남아있는 시대입니다. 성경에서 재림에 대한 예언을 찾고 그것을 즐겨 묵상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려야겠습니다.
 
한편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들을 통해 이 놀라운 구원을 세상 만민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이 구원의 복음은 너무도 신비로워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살펴보고 깨닫기 원합니다. 복음전파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 흩어진 나그네들을 복음전파의 통로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II.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3-25)
1절에서 12절까지 흩어진 나그네의 참된 신분과 산 소망, 하늘의 유업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그들의 믿음과 기쁨, 그리고 마지막 구원과 복음역사를 장엄한 스케일로 되짚어주던 사도 베드로는 이 나그네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13절부터 25절까지 알려줍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헐렁한 옷을 입었는데 일할 때는 허리를 끈으로 졸라매어 옷이 펄렁거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나그네는 마음이 세상을 향해 헐렁하게 펄렁거리지 않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단단히 졸라 매야 합니다. 우리 모임은 일용할 양식, 일대일 성경공부, 주일예배 말씀, 소감에다 이제는 온라인 성경통독, 단톡방 말씀암송, 새벽기도, 금요예배까지 가끔 말씀으로 너무 졸라맨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 때 말씀에 붙들린 바 되어 죄에 빠지지 않고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그렇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주님의 재림 시에 임할 은혜, 곧 마지막 구원과 하늘의 유업을 온전히 바라봐야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사욕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나그네는 아버지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식처럼 살아야 하는데 이전에 따르던 사욕과 자꾸 부딪힙니다. 베드로전서 4장 3절은 이 사욕을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로 표현합니다. 이 중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욕을 추구하는 삶에서 단호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혹 진리의 말씀이 점점 지겨워지고 부담스러워진다면 이는 정욕, 물욕, 쾌락욕, 명예욕 등 사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기 때문입니다. 괜히 쉬고 싶고 즐기고 싶고 타락하고 싶어지는 것도 모두 이 사욕이 꼬리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이 사욕이 더욱 미쳐 날뛰면 사람이 짐승처럼 변합니다. 쾌락에 중독되고 분노에 사로잡히고 미움을 못버리고 세상 것을 얻으려고 혈안이 됩니다.
 
15절, 16절을 보십시오. 나그네는 사욕을 본받는 대신 주님을 본받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죄가 없으시고 모든 피조세계보다 높은 곳, 저 하늘보좌에 계십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시며 율법을 범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대신 당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진실로 우리가 거룩해질려면 헛된 우상을 버리고 주신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나아가 삶의 목적을 자아실현, 자기영광, 자기만족에서 주님 사랑,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로 바꿔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자기만족과 세상영광이라면 그것은 거룩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우상숭배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 사람은 거룩과 점점 멀어지고 결국 썩어질 자신과 세상을 섬기다가 죄악의 열매만 맺습니다. 반면 성격이 좀 거칠고 능력이 참 부족하고 의지가 꽤 박약해도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꼭 붙들면 실패하고 훈련받으면서도 그 내면은 점점 정결하고 거룩해집니다.
 
한편 모든 행실에 거룩하라는 것은 말씀 읽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뿐 아니라 먹고 입고 말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요리하고 운동하고 심지어 씻는 것도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을 의지합니다. 내 마음이 가는 사람보다 주님의 마음이 향해 있는 사람을 더 사랑하고 섬깁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내 감정과 기분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 공평과 정의를 앞세웁니다. 먹든지 마시는지 주님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이때 그가 하는 모든 것에 주님의 임재가 깃들고 그의 삶은 주님의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본다는 것은 원어로는 편견에 사로잡혀 불공정하게 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공정하게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우리에게 요행이나 특혜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은혜로 사는 건 맞지만 어디든 은혜를 강요하며 하나님이 봐주실 걸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 일도 세상 일도 모두 주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합니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는 두려움이 있을 때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며 거룩에 이를 수 있습니다.
 
18절, 19절을 보십시오. 과거 우리는 조상들에게 물려 받은 헛된 행실을 따랐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헛된 행실을 망령된 행실로 표현했는데 원어는 이 단어를 우상숭배와 관련짓습니다. 우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우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죄악된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보다 우상을 사랑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 과거의 헛된 행실과 가증한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대로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그 지긋지긋한 죄와 우상에서 해방시킵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내 안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주시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거룩한 삶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을 때 항상 스피릿이 충만하여 적극적이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하나 감당하는 것은 경한 일이요, 과거의 나처럼 죄의 더러운 시궁창에 뒹구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영적인 의사요, 목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자신을 드리고 희생할 때 우리의 거룩은 이 땅을 기어다니는 것에서 벗어나 창공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독수리와 같이 온 세계를 누비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립니다.
 
20절, 21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어찌하든 그리스도를 더 알리고 자랑하려 합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미리 알려졌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마지막 때에 한 아기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죽으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이 하나님께만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나 세상을 믿고 소망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나그네에게 일어난 역사를 진리와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그가 복음 진리, 곧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영접할 때 모든 죄를 사함받고 갓난아기처럼 깨끗한 영혼으로 거듭납니다. 이제 그는 거짓을 버리고 미움이 사라져 형제를 사랑하고 싶어집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면 함께 주 안에서 형제된 분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배깁니다. 그런데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와서 그런지 사랑이 웬지 쑥스럽고 낯설고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자신을 부인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 앞에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처음 온 형제에게 안부도 묻고 동역자들의 기도제목도 물어봐야 합니다. 사랑이 식어가는 이 말세의 때에 저희 모임에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역사를 이루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또 이 사랑이 저희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양들과 이웃에게 흘러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고난받고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기도로 물질로 흘러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3절에서 25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거듭난 것'의 원어는 완료분사로 앞의 '깨끗하게 하여'처럼 세례 받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진 상태를 뜻합니다. 썩지 아니할 씨,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주의 말씀, 복음이 모두 같은 의미로 우리를 거듭나게 한 주체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신의 탄생이 부모의 씨 때문인 것처럼 우리의 거듭남은 말씀의 씨, 곧 복음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풀처럼 마르고 그 영광이 꽃처럼 떨어지는 것에 반해 우리의 거듭남은 영원토록 견고하고 늘 말씀으로 유지될 것입니다. 말씀으로 거듭난 생명은 시련에도 꺾이지 않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이전에 이 말씀을 읽으면 ‘왜 이렇게 어려운가!’ ‘무슨 말인지 참 어렵게도 썼다’ 하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계속 읽으며 믿는 자가 얼마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인지 조금씩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하늘 소망, 믿음, 거룩, 말씀의 씨가 영광의 장소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한편 작년 겨울에 옮긴 새 직장에서 저는 재테크의 귀재들과 영업의 달인들을 만났습니다. 어린 그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도 이룬 것도 없고 무능한 것 같아 씁쓸했습니다. 얼마전 회식 자리에서 다들 야한 농담을 즐겁게 주고 받는데 저는 그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 이 말씀을 공부할 때 한 선배님이 세상과 구별된게 진짜 큰 축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복을 받았는지 실감이 났습니다. 중학교 시절 아이들을 모아놓고 야한 이야기를 신나게 떠들어대던 저를 주님은 가정을 귀히 여기고 순결을 중히 여기는 자로 빚어가십니다. 거친 말과 행동으로 상처제조기란 말까지 들은 저를 주님은 여러가지 실패와 상대적인 무능을 통해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겸손한 자로 다듬어가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주님의 구원만을 갈망하고 이를 놓칠까봐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며 이 땅의 것에 매이지 않는 나그네로 살게 하십니다. 제가 더욱 겸손하게 주님이 주신 믿음을 놓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더욱 비우고 보내주신 양들을 섬기는 목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말씀만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받길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해도 결국 풀의 꽃처럼 시들고 모든 육체는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멸망할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가진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우리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상과 세상에 대해 그 영광과 쾌락에 끌리는 사욕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자주 그분께 나아가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나를 깨끗케 하고 그분의 말씀이 나를 거룩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저희 각 사람 가운데 새겨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