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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절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절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그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절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하니

 

거라사인의 땅, 이방인의 땅이다. 거기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과 만났다. 옷도 입지 않고 집에 거하지도 않고 무덤 사이에 거하던 자였다. 옷은 겉으로 드러난 정신의 상태다. 피곤하고 불안하면 옷차림부터 흐트러진다. 의욕이 떨어져도 그러하다. 귀신에게 완전히 통제력을 빼앗긴 사람은 옷 입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집에 있지도 못한다. 나도 집에 오래 있으면 갑갑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귀신들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까? 이 사람은 예수님께 자기를 괴롭게 말라고 간청한다. 귀신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한다. 하지만 죄인은 심판주를 피하면서도 또 용서를 받고 싶다.

 

성경을 읽고 교회를 나가며 내게 예수님은 마지막 날 온 인류를 심판하러 오시는 분으로 각인되었다. 세상은 악하고 악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운명이나 우연이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 나아보였다.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 죄를 심판할 권리를 가지시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심판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죄사함, 은혜를 수천 번도 더 듣지만 여전히 죄를 사랑한 자신이 심판대 앞에 서는게 두려웠다. 이 귀신들린 자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29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절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절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절 마침 그 곳에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락하시니

 

예수님은 귀신과 사람을 분리하여 귀신에게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다. 다행이다. 귀신들려 미쳐버린 사람에게도 소망을 두시고 귀신을 내쫓으려 하신다. 귀신이 심하게 들리면 쇠사슬과 고랑도 끊고 광야로 뛰쳐나간다. 그 옛날 가정이 굴레 같고 긴긴 밤은 감옥 같아 밤거리를 정처없이 헤매며 만화, 담배, 음란에 중독이 되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 몸과 정신을 더럽힌다. 이중 음란이 떨쳐버리기가 가장 힘들다. 육신은 어떻게 달래도 생각은 언제나 힘들다.

 

군대 귀신. 귀신 하나도 감당할 수 없는데 군단이 들어와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정체가 드러난 귀신은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늘 내 안에 또아리튼 귀신, 사악, 흑암을 드러낸다. 무엇이든 떳떳하지 못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것들이다. 말씀이 드러내기 전에는 친구 같고 반려동물 같던 것이 말씀 앞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렇게 쫓겨 간 것들의 목록이 참 길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신앙생활은 내게 들러붙어 있던 귀신들, 죄들, 더러움들을 하나씩 떼어내는 작업 같다. 그런 면에선 내 고통스럽고 어두컴컴했던 나날들이 병이 깊어 한 번에 끝나지 않는 긴긴 수술의 과정 같다.

 

돼지 떼. 돼지도 사랑스러운 동물이지만 인간보다는 덜 소중하다. 인간을 위해서 돼지를 희생하시는 게 주님의 마음이다. 양과 소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중한 존재를 위해 덜 소중한 존재를 희생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한 사람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법과 양심, 윤리를 저버리면서까지 소중한 존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돈과 재산, 덜 소중한 생명은 희생할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존재들을 위해 어떤 돼지 떼를 희생해야 할까?

 

33-39절 돼지떼가 귀신때매 몰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귀신들린 자의 구원받은 사실을 듣고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 귀신이 나간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구했으나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신다. 영접하지 않는 자들이 있고 함께 있기를 거부당하는 자들도 있다. 전자는 저주이고 후자는 사명이다. 그 어떤 끔찍하고 더러운 죄보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죄가 훨씬 심각하다. 전자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후자는 영원한 멸망뿐이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만은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