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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절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라 산에 올라가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의 이름은 성경에 자주 나온다. 열두 제자보다 훨씬 많이. 더 친밀하고 그들 앞에서 더 은밀한 기적을 행하셨다. 그들 역시 더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다. 뜬금없지만 러시아어를 공부하느라 '트로츠키'라는 러시아 드라마를 봤는데, 소련 공산주의 혁명사에서도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이름이 가장 빈번하게 오르내린다. 물론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권력욕의 화신도, 피도 눈물도 없는 미치광이도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택함을 받아 더 중요하고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왜 여기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순서가 아니라 요한이 야고보보다 앞섰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주로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간택되어 함께 갔다.

 

29절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기도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통로다. 나도 언젠가 이국 땅 셋방에서 로마서 말씀을 읽다가 자신의 비천함과 연약함에 깊이 탄식하며 무릎을 꿇고 엎드린 적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신비로운 빛과 영광스러운 기운으로 임하셔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가 가사를 실감했었다. 물론 그 뒤에 계속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 온전히 산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지극히 컸다. 주님께서 기도 중에 그 용모가 변화되고 광채나는 흰 옷으로 변화된 것은 본래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어떤 모습이셨는지 알려 준다. 주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의 주님이시다.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요한계시록이 말한 대로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이다.

 

30절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절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기도 중에 구약의 인물들도 예수님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그들 역시 영광에 휩싸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했다. 온 인류가 고대하던 구원의 순간이 바로 이 때임을 모세와 엘리야 역시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감격 가운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주님과, 구약의 인물들과, 신약의 인물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물론 지금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이 희미하고 그것이 내 상상인지 실제 주님이나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인지 분간이 안 되지만, 장차 하늘나라에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처럼 분명해질 것이다.

 

32절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누가는 역시 디테일한 역사가이다. 제자들이 깊이 졸았고 베드로가 초막 셋 이야기를 한 것이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베드로는 이후 보자기 사건 때도 비몽사몽간에 영적인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역시 비몽사몽 간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초막 셋 이야기를 꺼냈다. 참 실없고 무계획적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의 수제자다. 횡설수설, 잘 모르면서 말하기 좋아하는 나도 소망이 생긴다. 물론 말은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이 좋다. 어젠 화상회의인데 화면은 안 나온 채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회사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참 민망하게 말문이 자주 막혔다. 외국어로 말하는 연습을 좀더 해야겠다.

 

34절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35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절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여기서도 누가의 객관성과 정확성에 감탄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에는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다고만 나와 있는데 누가복음만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고 부연설명하며 각 주체들의 정확한 행동을 묘사한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난 것은 세 복음서 모두 동일하다. 구름 속 소리는 예수님을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선포한다. 마태복음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 마가복음에는 '내 사랑하는 아들'로 표현한다. 그리고 소리 이후엔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기록하여 결국 최후에 의지할 분은 그 어떤 선지자도 아닌 예수님 한 분임을 강조한다. 이 놀라운 표적 앞에 제자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직 예수'라는 구호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람들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오직'도 '예수'도 나를 그물 안에 가둬 내 행동과 의지를 통제하려는 단어처럼 보인다. 어느 광고처럼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온 세상에 외치고 싶다. 하지만 살아보니 내 자유란 늘 욕망과 죄악에 흔들리고 그 어떤 선하고 좋아 보이는 것도 내게 온전한 자유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참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나에게 진짜 자유를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인 나도 '오직 예수'라는 구호를 담대하게 외친다. 거기다 예수님은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하늘나라의 영광도 때때로 선물처럼 허락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