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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누가복음 9장 43-56절: 큰 자(2020.03.06)

사실 너머의 진실 2020. 3. 6. 08:27

43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절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절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사람들, 무리들은 자주 변한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놀라고 떠들다가 바로 그 예수님을 죽음에 넘겨 준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묻기도 두려워했다.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에 이끌려 그 분을 흠모하고 따르더라도 그 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깨닫고 영접하지 못할 수 있다. 내 젊은 날도 그 분을 가장 위대한 스승이요 사회운동가, 심리치료사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 분의 십자가를 바라보기엔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너무 컸다. 지금도 자아가 불쑥 불쑥 고개를 쳐들지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추악한 자인지 지난 삶을 통해 깊이 인지하여 주님의 십자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어제 꾼 꿈도 처음엔 미국 기차 횡단 여행에서 얄궂은 성애 영화의 한 장면으로 끝나서 정말 자신의 머릿속이 놀랍기만 했다. 내 생각, 정신, 이성의 온갖 추악한 부분도 십자가에 못 박기를 간절히 바란다.

 

46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누가 크냐? 자리 싸움은 어느 사회나 필연적인 것 같다. 예수님의 해결 방법은 좀 다르다. 누가 큰지 투표를 하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으신다. 큰 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도 무시하지 않으신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당신 곁에 세우신다. 어린 아이가 주님과 가장 가깝다는 의미일까?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최종 판결은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큰 자라고 추켜세우더라도 주님이 큰 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시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얼마나 인정받는 자가 되고 싶었나? 운동이 안 되면 공부로, 공부가 안 되면 인기로 사람들이 좋아하고 추켜세워주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이제 어린 아이, 연약한 자, 모자란 자를 영접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들을 주님처럼 사랑하고 섬기고 세워주는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이 마지막 날 주님께서 내게 미소지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늘 이런 말씀을 접할 때마다 깨닫게 된다.

 

49절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절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절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절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반대만 안 해도 끌어안을 수 있다. 함께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함께 하지 못 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내 모난 성격 때문일 수도, 그의 소심한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구라도 복음을 반대하지만 않으면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이번엔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부류다.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 나서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받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도 그들을 파괴하지도 않는다. 소련 공산주의 혁명사는 피와 불로 얼룩져 있고 그것을 혁명 논리로 정당화한다. 하긴 예수님도 포도원지기들을 진멸하는 것을 정의라고 보시니 파괴와 심판이 늘 부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반대 내지 배척하는 것의 차이는 뭘까? 정치와 권력, 심판은 늘 어렵기만 하다.